아저씨, 부르셨어요?
내가 가진 당당한 변명 중 하나는 이름 부르지 않았는데도
아무 때나 나타나서 나타나샤로 불린다

일기장 열어 놓고 잠든 사이 필통 속의 소녀가
옆구리에 분홍 풀밭을 끼고
서 있다
소녀는 입천장에 눌러 둔 구름을 하나씩 떼어내
혀끝으로 불어 올린다

구름의 허리를 찌르니까 비가 내린다
얘기해 봐, 나타나샤!

넝쿨장미 손가락을 불끈 쥔 여자가 있었습니다
낭만이라고는 머리카락 한 개 흔들림 없이 후들후들
비애에 흠뻑 젖어
망각의 마스카라 숯가루가 눈두덩에 번지고
속눈썹 파르르
옷이 하나도 젖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죠, 비애는 스스로 젖지 않으니까

비가 오지 않는 날
생각이 생각에 젖는다는 건 뻔뻔한 일이죠

눈물과 비는 한통속
생각을 질질 끌고 다니다가
필요하다 싶으면 필요하지 않은 곳까지 기웃거리고
신뢰는커녕 신발도 없이
혹시

신뢰 대신 신발이 필요해요, 그렇게 말한다 해도
실례는 아니잖아요
아무렇게나 닳아빠진 생각 아무 때나 막 신고 다녀도
망신살은 아니잖아요

아무도 부르지 않아도 소녀는 오늘, 그 이후로도
당당하게 나타나쌰!

지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