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나무 가지에 바람도 까치도 오지 않고
이웃 절집 부연(附椽) 끝 풍경도 울지 않는 겨울 오후

경지정리가 잘 된 수백만평 평야를
흰 눈이 표백하여 한장 원고지를 만들었다

저렇게 크고 깨끗한 원고지를 창밖에 두고
세상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울 문장을 생각했다

강가에 나가 갈대 수천그루를 깎아 펜을 만들어
까만 밤을 강물에 가두어 먹물로 쓰려 했으나

너라는 크고 아름다운 문장을 읽을 만한 사람이
나 말고는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아서

저 벌판에 깨끗한 눈도 한 계절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결심하였다

발목 푹푹 빠지던 백양리에서 강촌 가던 저녁 눈길에
백양나무 가지를 꺽어 쓰고 싶은 너라는 문장을

김광규